문장/에세이

영등포 나들이

김그린. 2022. 4. 19. 21:41

아무 일도 없이 쉬는 백수지만 글도 쓰고 공부도 하려고 노력 중이다. 정확히 말하면 노력 중이라기보다 노력해야 한다고 해야겠다. 꼴에 나름 이것도 일이라고 집에서 하려고 하면 집중이 잘 안 된다. 업무에 있어 공간을 분리하는 것은 아주 좋은 전략이다. 한 공간에서 모든 일을 한꺼번에 하다 보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될 때가 많다. 한 가지 일에 제대로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이면 아무 약속이 없더라도 오늘만큼은 뭐라도 해야겠다 싶으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는 편이다.

작정하고 외출을 하였다면 행선지는 적어도 20분 이상 소요되는 장소로 선택한다. 동네 카페에 가본 적은 거의 없다. 동네는 뭔가 외출한 느낌이 들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무척 외딴 동네라서 집에서 30~40분은 걸어가야 다른 동네를 만날 수 있다. 산책이면 모를까 외출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동네이다. 기껏 해야 도서관 정도인데 도서관은 딱 공부를 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거나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때 선택하는 곳이라서 이런 경우와 성격이 약간 다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멀리 나오면 기분은 좋다. 집 근처인 수원이 아니고서야 웬만하면 1시간 이상은 감안해야 한다. 경기도민의 숙명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1시간 30분 거리를 4년 넘게 통학하다 보니 오히려 그 시간을 알차게 활용하는 데 도가 텄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날이 좋으면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기도 한다. 사람들 옷차림을 구경하는 것도 지하철의 재미 중 하나이다. 옷차림을 보면서 계절의 변화도 느끼고 유행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기도 한다. 사소한 일이지만 나에게 무척 소중하다. 사람들을 보며 세상이 달라지는 모습도 보고 그러면서 나도 그 안에서 살아간다는 의욕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늘의 행선지는 영등포였다. 동네 말고 다른 곳을 찾아다닌다고 해서 행선지가 다채로운 것은 아니다. 대개 집에서 가까운 수원이거나 아니면 내가 잘 아는 종로 인근으로 돌아다니는 편이다. 늘 그런 곳만 가니 오늘은 색다르게 영등포를 선택했다. 타임스퀘어를 안 가본 지도 꽤 오래되었고 마침 청바지도 한 벌 사야 하는 참이었다.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오늘 외출은 실패였다. 본래 큰 쇼핑몰을 보면서 옷을 두루두루 구경하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대상이 없이 큰 쇼핑몰에 들어오니 뭘 봐야 할지 영 감이 안 잡혔다. 매장에서 점원과 대화하는 일을 별로 안 좋아해서 멀찍이서 구경만 하는 편인데 그렇게 하려니 타임스퀘어에서 할 일이 없었다. 그냥 큰~ 건물을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었다. 사려던 청바지도 못 샀다.

타임스퀘어는 식당도 별로였다. 일단 먹을 만한 식당이 별로 없었다. 그 큰 건물에서 식당이라고 해봐야 지하에 있는 몇 개와 층에 남아 있는 한두 개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별로 매력적인 식당이 없었다. 겉만 번지르르해서 가격은 비싸고 퍽 손이 안 가게 생겼다. 그래도 뭐라도 먹어야겠으니 담백한 국수집으로 들어갔는데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해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다. 오후 2시 반에 브레이크 타임이라니 좀 이상했다. 

안 간 사이 인테리어를 싹 탈바꿈한 교보문고를 본 것이 그나마의 수확이었다. 원래 되게 밝은 매장이었는데 최근 교보문고의 인테리어 추세에 맞게 어두운 톤으로 바꾸었다. 색이 바뀌어서인지 정말 구도를 다 바꾼 것인지 몰라도 계산대를 제외한 다른 구역은 다 달라진 느낌이었다. 다만 예전에 비해 진열된 책이 줄어서 아쉬웠다. 진열장에 책을 빼곡히 두지 않고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구역은 표지가 잘 보이도록 진열하는 것이 트렌드인 듯하다. 다른 책은 책장 아래나 가장자리 서가에 진열해두는데 이런 구도를 택하면 자연스럽게 진열할 수 있는 책의 가짓수가 줄어든다. 내가 좋아하는 인문 서적은 대개 이런 경쟁에서 밀려나 가장자리로 가거나 창고로 가기 일쑤다. 

밥도 못 먹고 청바지도 못 샀다. 영등포에 더 있어 봐야 딱히 건질 것이 없다고 봐서 재빨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집 근처 순대국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밤이 되어야 글을 썼으니 오늘은 꽝이었다. 그래도 그걸 주제로 이렇게 글을 하나 썼으니 꽝이라고 하면 좀 야박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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