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에세이

종점에서 내리니까 괜찮아

김그린. 2022. 7. 5. 22:46

세상에는 별의 별 기념일이 다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추석, 설날도 일종의 기념일이다. 빼빼로데이처럼 회사가 만들었지만 일상에 깊이 스며든 날도 있다. 삼겹살데이나 로즈데이처럼 언제부터 있었는지, 왜 그 날이 기념일인지 정체성이 궁금한 기념일도 있기 마련이다.

오늘은 철도의 날이란다. 왜 하필 6월 28일이 철도의 날일까? 그건 내가 아니라 검색엔진이 해결할 문제니까 여기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고 지하철과 관련된 작은 이야기를 하나 할까 한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집에서 멀었다. 하지만 자취를 할 정도로 먼 곳은 아니었다. 실제 거리는 가깝지만 대중교통으로 가면 멀었다. 속편하게 대학 근처에 자취방을 구하면 좋았겠지만 그럴 돈도 없었고 그럴 만큼 값어치 있는 일도 아니었다. 편도로 약 1시간 30분 걸리는 거리를 매일 같이 오갔다. 대학을 다니지 않는 요즘도 친구나 후배를 보기 위해서 가끔 찾아가는데 그때 그 먼 거리를 어떻게 다녔느지 의아하다.

지금에야 그렇지 그때는 먼 줄 모르고 잘만 다녔다. 그럴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분당선의 종점이 수원역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수원역에서 환승하여 1호선을 이용하였는데 수원역이 분당선의 종점이었기에 역을 지나칠 일이 없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막차 시간에 쫒겨 헐레벌떡 지하철을 타도 마음은 편했다. 자리만 보이면 바로 앉아서 자면 되었다. 시험과 과제로 하루하루 찌들어 가던 때에도 분당선만 타면 마음 놓고 편히 잘 수 있었다. 그래서 1시간 30분의 먼 거리를 다닐 수 있었다.

지금은 할 수 없는 일이다. 2년 전엔가 수인선과 분당선이 연결되면서 수원역은 더 이상 종점이 아니게 되었다. 예전처럼 깊이 잠에 들었다가는 오이도에서 내릴 수도 있다. 막차도 다 끊길 시간에 생전 가 본 적 없는 오이도에서 내릴 때, 얼마나 막막한 심정일지 생각만 해도 깝깝하다. 요즘 대학을 다녔으면 한두 번 안산에서 내리고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어서 고시원이라도 구했을 것 같다. 운이 좋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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