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20

김현철 - 『32℃ 여름』

김현철의 1집과 3집에 관한 이야기를 19년도에 쓴 적이 있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시티팝의 인기가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나 또한 그 열풍에 발맞춰 수많은, 시티팝이라고 우리가 일컫는 음악을 많이 들었다. 타츠로 야마시타, 마리야 타케우치, 빛과 소금, 봄여름가을겨울 등등. 그 중에는 김현철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한 번쯤 이 시절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려고 했다. 1집과 3집을 다룬 글은 그런 맥락에서 쓰게 된 글이었다. 사실 그 글은 본래 두 음반을 다루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었다. 대중에 널리 알려진 두 음반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2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글을 완성하고 후속작으로 2집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자 했지만 다른 주제의 글을 먼저 써야만 했다...

이야기/음악 2023.01.09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정원은 작은 도시에서 사진사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사진관 앞에는 한 여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정원은 우연히 학창 시절 첫사랑 지원을 마주치게 된다. 먼 곳에서 살고 있는 줄 알았건만 그녀는 작은 문제가 있었는지,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지내고 있었다. 정원은 옛 사랑이 떠올라서 괜스레 마음이 퍽 설렜다. 그러나 그 이후 정원의 사진관에 찾아온 지원은 서먹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눈 뒤 사진관에 걸려 있는 사진을 내려 줄 것을 부탁하였다. 버스에 앉은 정원은 바람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창 너머의 세상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슬픈 낯빛은 아녔지만 그의 눈빛엔 허전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때 화면 너머에서 음악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

이야기/영화 2023.01.08

과거에 산다는 것

몇 달 전 우연히 ‘집 번호를 준다는 것은’ 이라는 곡을 들었다. 에픽하이가 랩을 하고 린이 노래를 부른 이 곡은, 헤어진 연인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온 지 14년이나 된 곡이라서 기억이 희미하지만 엠넷 채널을 보다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감성에 젖게 만든다. 하지만 너무나 오래된 느낌이 든다.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의 편곡 때문만은 아니다. 제목에 떡하니 쓰인 ‘집 번호’ 라는 단어 때문이다. ‘집 번호.’ 라는 단어는 정말 낯설다. 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집 번호를 물어 봤던 게 언제였을까? 집 번호로 연락했던 적은? 그게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낯선 일이 되었다. 집 전화는 시골에 사는 할머니댁에서나 보는 물건이 되었다. 혹여 집에 두었어도 그 존재를..

이야기/음악 2023.01.01

잠이 오지 않던 밤들 - 로꼬, 『잠이 들어야』

군대에서의 첫날은 기막힌 하루였다. 그때는 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여러 명이 밀집해서 지내는 그곳의 특성상 방역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나는 약한 기침 증세가 있었는데 그 사실을 솔직히 말하자 나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그곳은 코로나19에 걸렸을지 모를 유증상자를 격리하는 시설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1인 1실 격리를 해야 했다. 하얀 벽에 침대와 책상이 있었고 책상 위에는 훈련 교본이 있었다. 널찍한 방에 혼자서 훈련 교본만 붙들고 하루를 보내려니 막막했다. 그래도 모자를 푹 눌러쓰고 험악한 인상으로 훈련병을 맞이하는 조교를 마주치지 않았다는 데 만족했다. 문제는 밤이었다. 진주의 8월 말은 더웠다. 그러나 방은 통풍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에어컨은 없었고 선풍기 한 대만이 천..

이야기/음악 2022.11.08

어린 날의 영웅들 - Nieve,『風の中のプリズム(바람 속의 프리즘)』

올해 초부터 포켓몬빵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00년대 초중반에 나와 큰 인기를 끌었던 포켓몬빵을 재출시한 제품이었다. 특히 이 제품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캐릭터와 포켓몬을 위주로 만들어져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포켓몬빵을 찾는 사람이 어찌나 많았는지 ‘우리 가게는 포켓몬빵이 없어요’라는 종이를 붙인 편의점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어릴 적 먹었던 맛이 기억나지 않아 먹어 보고 싶었는데 인기가 너무 많아서 실물을 보지도 못했다. 엄밀하게 말해 나는 포켓몬스터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때, 소위 무인편이라고 하는 시기를 직접 보고 자란 세대라고 할 수는 없다. 무인편이라고 하니 무척 생소할 텐데 간단히 말해 피카츄가 처음 등장하고 이슬이와 웅이가 함께 다니던 작품이라고 하면 아실 것 같다. 그 작품이 S..

이야기/음악 2022.11.07

우연이 만들어준 인연 - 윤종신,『배웅』

2012년 겨울,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수업 진도가 다 나가고 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율학습 시간이 주어진다. 나는 전자사전을 가져와서 음악과 라디오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날은 옆자리 친구가 자기도 듣고 싶다고 하길래 이어폰 한쪽을 건네주었다. 여러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 EBS 라디오에서 멈췄다. DJ는 노래 한 곡을 소개하며 프로그램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무척 생소한 노래였지만 나와 친구는 아무 말 없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감상했다. 그 노래는 윤종신의 ‘배웅’이었다. 당시 나에게 윤종신은 가수보다는 방송인에 가까웠다. 팥빙수 노래도 들어 본 적이 있었고, ‘교복을 벗고~’라고 시작하는 노래도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노래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찾아 듣는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이야기/음악 2022.11.07

다시는 함께할 수 없는 산책 - 소히, 『산책』

백예린의 노래 중에서 ‘산책’을 제일 좋아한다. 제목 그대로 산책할 때 듣기 좋다. 잔잔한 멜로디를 들으며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보면 우울했던 기분도 한결 나아진다. 좋은 노래가 꼭 걸출한 가창력과 뛰어난 연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님을 이 곡을 들으며 느낀다. 노래를 들으며 가사를 종종 생각해봤다.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지 시간이 좀 흐른 듯하다. 절절하게 상대를 그리워하기보다 종이에 물 한 방울이 톡 하고 떨어진 뒤 서서히 스며들 듯이 상대를 기억하고 있다. 산책을 하며 그 사람과 먹었던 음식이 떠오를 수도 있고 함께 놀러 간 여행지가 생각날 수도 있다. 추운 날 내 손을 잡아주었던 따뜻한 손길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그런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보는 산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참 애틋한 ..

이야기/음악 2022.10.03

참, 잘 했어요 - 윤종신, 『잘 했어요』

“정말 견디기 힘든 지난 한 해였다. 일은 일대로 풀리지 않고 가슴은 답답하고. 그런 모든 고민들을 털어놓고 얘기 나눌 사람은 이미 나를 떠난 지 오래고. 잊으려고 여러 사람 만나 보기도 하고 좋아하려고 사랑하려고 애써봤지만 그럴수록 내 자신이 민망하고 창피하고. 그런 99년을 하루 남겨두고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냥 그렇게 잊어가는 것 같았는데. 멍하니 처음 만났던 청담동 카페 근처를 이리저리 돌다가 성진이 형 스튜디오를 찾았다. 혼자서는 그날을 보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술 기운이 어느 정도 올랐을 때 난 태어나서 가장 서럽게 울어댔다. 멍청하게, 볼품없게, 지저분하게. 내 가사 속에선 그렇게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애썼던 그 눈물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00년 4월 ..

이야기/음악 2022.10.03

매해 돌아오는 8월의 크리스마스

17년 겨울엔가 배우 김주혁이 사고를 당해서 유명을 달리했다는 뉴스를 아르바이트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기억이 난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중에 생긴 일이어서 그 충격은 더했다. 그 소식을 듣고 한동안 그가 남긴 인터뷰나 관련된 기사를 틈틈이 찾아 보았다. 집에서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그 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부분이 있는데 여러 영화를 찾아 보지 않고 좋아하는 영화를 자주 돌려 본다는 이야기였다. 널찍한 티비도 아닌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말이다. 나와 참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는 일이 드물다. 작은 화면도 화면이거니와 마우스 커서(스마트폰은 터치)만 살짝 돌리면 다른 것을 만질 수 있는 특성상 산만해지기 쉽상이어서다. 그래..

이야기/영화 2022.07.05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를 넘어 - <반짝이는 박수 소리>

트로이 코처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수상은 1987년 '작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a Lesser God)'로 말리 매들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래, 청각장애인이 아카데미 상을 받은 두 번째 사례라고 한다. 94년 아카데미 역사 동안 단 두 번밖에 없었고 말리 매들린의 수상이 지금으로부터 35 년 전 일이니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장애의 벽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나마 허물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견고하다.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예술 영역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 역사와 맥락을 고려할 때 트로이 코처의 수상은 정말 특별할 수밖에 없다. 멋있었다. 나는 35년만에 나온 청각장애인의 오스카 수상보다 그의 수상을 축하하는 관객이 더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영화 2022.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