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음악

김현철 - 『32℃ 여름』

김그린. 2023. 1. 9. 17:07

 

김현철의 1집과 3집에 관한 이야기를 19년도에 쓴 적이 있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시티팝의 인기가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나 또한 그 열풍에 발맞춰 수많은, 시티팝이라고 우리가 일컫는 음악을 많이 들었다. 타츠로 야마시타, 마리야 타케우치, 빛과 소금, 봄여름가을겨울 등등. 그 중에는 김현철도 빼놓을 수 없었다. 한 번쯤 이 시절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려고 했다. 1집과 3집을 다룬 글은 그런 맥락에서 쓰게 된 글이었다. 

사실 그 글은 본래 두 음반을 다루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었다. 대중에 널리 알려진 두 음반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2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글을 완성하고 후속작으로 2집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자 했지만 다른 주제의 글을 먼저 써야만 했다. 글의 존재를 조금씩 잊어버렸다. 결국 19년 2월에 쓴 글의 후속작을 3년도 더 지난 지금에서야 쓰게 되었다. 어떤 이는 10년이 지나서야 약속한 음반을 내놓는데 그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다. 3년이 흐른 만큼 처음 글을 구상하던 시절의 생각과 다소 달라졌다. 글을 아예 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시작한 것을 제대로 끝맺음하는 책임도 꽤 멋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김현철의 1집과 2집 사이에는 3년의 공백이 있다. 가수가 음반 작업을 하는 데 그리 긴 시간의 공백이 아니라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한국 가요계는 1년에 음반 한 장을 제작하던 시절이기 때문에 3년 동안 한 장의 음반만 만드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특히 한창 창작열을 불태울 법한 시기에 그런 일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다. 

김현철은 1집의 성공 이후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를 겪게 되었다. 90년 5월경의 일인데 남산 1호 터널을 지나던 그는 갑자기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이 마비되는 증상을 느꼈다. 그로 인해 큰 교통사고를 겪었다. 병원의 진단은 뇌경색이었고 몸의 오른쪽에 마비가 왔다. 결국 그는 치료와 휴식으로 인해 오랜 기간 음악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철 - '그런대로'

2집은 사고 이후에 나온 작품이었다. 3년이라는 공백 때문인지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고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음반으로 남았다. 음악성은 명반으로 꼽히는 1집에 미치지 못하고 대중성은 히트곡 ‘달의 몰락’이 있는 3집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여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2집은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고 충분히 좋은 음반으로 꼽을 만하다.

2집은 1집과 3집 사이의 과도기의 느낌이 있다. 여전히 퓨전 재즈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는 점에서는 1집과 비슷하지만 편곡에서 전자 악기의 비중이 증가하였다는 점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전자음 위주의 편곡에 낮은 음역대의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로 시작하는 ‘그런대로’는 이러한 차이를 확인하기 좋은 곡이다. ‘누구라도 그런지’ 역시 ‘그런대로’와 전자음 위주의 편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어 또 다른 느낌을 낸다. 따뜻한 겨울이 담겨 있던 1집과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를 내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야샤(Yasha) - '시드니의 겨울'

사실 2집은 1집보다 그 사이에 있었던 야샤(Yasha) 음반과 더 가깝다. 야샤는 조동익, 함춘호, 손진태와 김현철이 함께 만든 연주 그룹이다. 1집 때부터 작업해온 사람들이었기에 일찍이 함께 음악을 만들었지만 김현철의 교통사고로 인해 음반 제작이 미뤄지다가 92년 3월에 ‘Yasha Collection’이라는 음반을 내놓는다. 이 음반에서 김현철은 ‘눈싸움하던 아이들’과 ‘시드니의 겨울’을 작곡했다. 김현철이 작곡한 곡뿐만 아니라 음반 전체적으로 2집과 유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야사 멤버들이 프로듀싱에 참여하기도 했다.

김현철 - '사과나무'

한편, 1집에서는 느끼기 어려웠던 팝의 느낌을 풍기는 곡도 몇 곡 보인다. ‘사과나무’와 ‘까만 치마를 입고’는 매력적인 멜로디 라인을 담고 있다. 1집 역시 좋은 곡이 많지만 퓨전 재즈의 색채가 강하고 짜임새 있는 편곡에 조금 더 힘이 실렸다면 위 두 곡은 편곡은 약간 뒤로 빠지고 멜로디에 더욱 힘이 실렸다. ‘까만 치마를 입고’의 경우 앞으로 김현철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화려한 브라스 편곡까지 보여주어 3집으로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그대 안의 블루’에 연주곡으로 담기는 ‘연습실에서’는 김현철의 발라드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곡이다. 이외에도 신인이었던 조규찬이 참여한 ‘나나나’ 역시 인상적인데 김현철의 노래라기보다 작곡⋅사에 참여한 조규찬의 느낌이 강해서 이색적이다.

2집은 1집, 3집 사이에서 제대로 된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그에 결코 뒤지지 않는 좋은 음반이다. 차가운 전자음 위주의 편곡은 따스한 겨울을 표현한 듯한 1집과 상이한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여전히 포근하고 편안한 멜로디는 3집 같은 팝의 색채도 엿볼 수 있기에 음반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는 1집, 3집보다도 신선하고 좋은 음반이다. 더욱이 이런 분위기의 음반은 그 이후 김현철에게서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에 생각보다 재밌는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