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우연한 계기로 선인장을 키운 적이 있다. 몇 년 전, 좋아하던 아이돌이 나온다는, 심지어 잡지사가 마련해둔 가게에 방문하면,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소식에, 공강 날 먼 길을 달려 다녀왔던 적이 있다. 그때 그곳에서 잡지를 받으러 갔다가, 그곳에 놓인 여러 환경과 관련된 이야기를 살펴보며, 그 잡지, 그리고 가게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끔씩, 그 잡지를 읽기 위해 그곳을 종종 찾아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 1층에 선인장을 파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평소 어머니가 식물을 많이 키우시는 데다, 개인적으로 칙칙한 방안에 뭔가 활기를 불어 넣을 것을 찾고 있었던 터라, 그곳에 진열된 선인장에 관심이 갔다. 처음 봤을 땐, 그저 신기한 눈빛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다시 방문했을 때, 할인 행사 중인 것을 보고, 고민 끝에 작은 선인장을 하나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직원 분은 내게, 물은 조금만 주시고요, 볕이 잘 들고, 추운 데만 피해주시면, 쉽게 키울 수 있을 거예요, 라며 선인장을 키우는 법에 대해서 알려주셨다. 식물을 키워본 경험이라곤 고등학생 때, 교실에서 키우던 작은 식물 두어 개뿐이었던 데다, 그 식물들을 제대로 키우지도 못해서 다 죽여 버린 기억밖에 없던 나는, 선인장은 비교적 쉽게 키울 수 있는 식물이란 직원 분의 이야기에 반색했다. 그래, 이건 잘 키울 수 있겠지, 하는 바람을 품고, 집으로 선인장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때는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선인장이 살기엔 너무 추운 겨울날이었고, 게다가 당시 우리 집은 애석하게도, 선인장을 키우기에 영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곳은 볕이 잘 들지 않아, 겨울에는 늘 추웠으며, 특히 내 방은 그 중에서 가장 그 정도가 심하여, 볕 한 줌 들지 않는 골방 같은 공간이었다. 그런 곳에서 선인장을 키운다는 것은, 그것은 ‘키우는’ 행위가 아니라, ‘죽이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추운 겨울에 선인장을 베란다에 내놓을 수도 없었다.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요, 그렇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는 너무도 깜깜했기에, 이걸 어떡해야 하나,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어찌 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을 안고, 컴퓨터를 켜서 선인장에 대해서 찾아 보기로 했다. 혹시나 그곳에는 나름의 해답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무위키엔 선인장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구에서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식물.’ 익히 알다시피, 선인장은 생명이 살기 너무도 척박한 사막에서 사는 식물이다. 사막은 매우 건조한 데가, 일교차가 극단적으로 심한 곳이다. 비가 많이 내리지도 않고, 마실 물을 찾는 일 역시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 생명이 살아 남기엔 너무나 힘들다. 선인장은 그런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 그래서 사막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선인장은 수분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대비를 한다.
선인장을 떠올려 볼 때, 아마 가시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나무나 꽃 모양을 하고 있는 선인장, 또는 가시가 아예 퇴화된 선인장도 있지만, 많은 선인장을 가시를 갖고 있다. 대개 식물은 잎을 가지고 있는데, 잎이 맡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증산작용이다. 식물의 잎은 광합성을 하여, 양분을 만드는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필요하다. 여기서 증산작용은 뿌리를 통해 흡수된 물을 잎까지 끌어올리는 원동력을 만든다. 잎의 기공을 통해, 물이 증발하고, 물을 보충하기 위해 잎맥의 물관에 연결되어 있는 물분자를 끌어올리고, 이 힘으로 뿌리에 있던 물이 잎까지 올라오게 된다. 이것이 증산작용이 식물의 생존에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보통의 환경과 판이하게 다른, 극도로 건조한 사막에 사는 선인장에게 있어, 양분을 얻기 위해 수분을 잃어버리는 것은 되려 생존에 매우 치명적이다. 따라서 선인장은 생존을 위해서 증산작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잎은 점차 가시로 퇴화되었다는 게 주된 학설이다. 다시 말해, 가시는 선인장이 사막에 살아 남기 위해 만든 필살기인 셈이다.
그런데 그때 선인장에 대한 이야기들을 되짚어 보며, 문득 정말 사막만 생명이 살기에 척박한 환경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매일이 생존의 연속이고, 서로를 끝없이 괴롭게 만드는 인간의 도시도, 어쩌면 사막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생명이 살기에 척박한 환경이 아닐까 싶었다. 누군가 나를 괴롭히지 않을까, 내가 양보하면, 내 시간, 내 돈을 낭비하지 않을까, 나에게 주어졌으면 하는 기회를, 그 몇 안 되는 기회를 누군가에게 뺏기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것이다. 물론 타인에게 선의를 기꺼이 베푸는 행위는 응당 좋은 일이 맞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이용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이익만을 찾는 하이에나가 도시엔 너무나 많다. 적어도 그런 생각을 지우기엔 정말 도시는 척박하고, 잔인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을 가면 속에 숨기고, 그 위에 냉소를 그려 놓는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마음에 새기고, 타인에 대해서 철저히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분명 잔혹한 도시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다치고 아프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 택한 방어적인 수단이다. 마치 수분을 잃지 않기 위해 잎을 퇴화시켜 만든, 선인장의 가시처럼, 도시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그곳에서 내 마음이 상처 입지 않기 위해, 감정을 퇴화시키고, 공감을 퇴화시켜서, 자신을 가리는 가면을, 장막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으로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다. 마치 죽을지 살지의 여부가 내 노력에 달려 있는 내 방 안 선인장처럼, 우리의 삶도 결국 더 강한 존재, 더 커다란 사회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 앞으로는,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삶을 바꿔나가는 방식은 견뎌낼 수 없어, 해낼 자신이 없어, 소극적이게나마나 자신이라도 지키고자, 가시를 만들었지만, 그것도 도시에선 아무 쓸모가 없어, 선인장의 미적 가치를 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선인장의 가시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냥 서로를 열심히 찔러서, 아픔만을 남기고, 또 다른 불신과 냉소를 낳을 뿐이다. 결국 도시 안의 삶은 내 자신을 지키는 일마저 실패한다.
내 선인장은 죽었다. 여러모로 해결방안을 찾으려 노력해봤지만, 그런 노력으로 살리기엔 너무 늦었고, 나는 그 선인장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과연 지금이나마 냉소라는 가시를 거둬 들이고, 다른 방식의 삶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하지만, 다른 방식의 삶을 택하는 길은 과연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걸까. 내 죽은 선인장처럼 결국 우리보다 더 강한 존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문제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다시 가시를 거둬 다르게 살기엔, 가시로 누군가를 찌르며, 자신을 지키지 않기엔 도시는 사막보다도 건조하고 차갑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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