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엘리베이터는 조용하다. 나는 거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괜히 카톡을 확인했다. 우리집이 있는 13층에 도착하기 전까지 엘리베이터 안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휴대전화를 보는 사람도 있고 멍하니 엘리베이터 상단에 표시되는 층수 표시만 쳐다 보는 사람도 있다. 층수를 알리는 안내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윗집이나 아랫집에 누가 사는지 잘 모른다. 그나마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얼굴을 알게 될 때가 있다. 가령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사람이 12층을 누른다. 그럼 나는 슬쩍 쳐다 보고 속으로 생각한다. ‘아, 이 사람이 우리집 바로 아래에서 사나?’ 내릴 때 방향을 보며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아파트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드물고 설령 마주쳐도 살가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다.
얼마 전 일이었다. 집에 들어오니 엄마와 형이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가방을 방에 두고 식탁에 앉아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아파트에 사는 한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였다. 강아지를 안고 있는 그분은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살갑게 인사를 건넨다고 한다. 형은 그날 처음 마주쳤고, 엄마는 매일 아침 보는 듯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서로 시선을 피하기 바쁜 공간에서 인사라니 다소 어색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났을까. 친구를 만나러 밖에 나가는 길이었다. 여느 때처럼 이어폰을 꺼내서 귀에 꺼내려던 찰나 누군가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나는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 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강아지를 안은 모습에서 엄마와 형이 말했던 그 아저씨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분은 생글생글 웃고 계셨다. 침묵이 더 익숙한 엘리베이터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며 엄마에게 그 아저씨를 만났다고 말했다. 강아지를 안고 있었고 살갑게 인사를 건네길래 그분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그 아저씨와 마주치며 나눈 대화도 들려주셨다. 정말 살갑고 좋은 사람 같았다. 엄마의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엄마 역시 그분처럼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계셨다. 아들 둘을 키우는 젊은 부부의 이야기. 대뜸 말을 걸어서 당황했지만 그 이후로 서로 안부를 묻고 지내는 아주머니의 이야기. 엄마에게 엘리베이터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나는 의아했다. 엄마와 내가 사용한 엘리베이터는 분명 같은 공간인데 둘이 느낀 분위기는 너무나 달랐다. 내가 타고 다녔던 엘리베이터는 침묵으로 가득차서 어서 벗어나고 싶은 어색함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엄마의 엘리베이터는 이웃과 어울려 지내는 골목길처럼 훈훈했다.
내게 아파트는 삭막한 곳이었다. 매체에 나오는 아파트 사람들은 옆집에서 누가 사는지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무심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래서 인사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서로 모른 체하는 상황을 으레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아파트에 대한 내 생각은 편견이었을지 모른다.아파트 안에서도 사람들 간의 온기와 정을 나누는 다른 길이 있던 건 아닐까? 친절한 아저씨와 엄마를 보며 내가 편견에 빠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장을 보고 집에 들어왔다.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려던 찰나, 한 할머니께서 들어 오고 있었다. 할머니가 타실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기다렸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셨다. 나는 활짝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층수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말씀해주신 층수를 대신 눌러 드렸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할머니는 먼저 내리셨다. 나는 ‘들어가세요’ 라고 인사했다. 평소 하지 않던 친절을 보이려니 조금 쑥스러웠다. 하지만 침묵보다 살가운 말 한 마디가 더 즐겁다는 것을 알았다. 문이 닫히고 나는 혼자 남은 엘리베이터에서 피식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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