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엄마 손에 이끌려 빨간 냄비에 천원을 넣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아무 것도 잘 몰랐지만, 그 의미를 알고 난 지금도 여전히 이맘 때면 빨간 냄비에 지폐 한 장을 넣고 온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나는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그런 고민 속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은 내 능력과 노력으로 결정되기도 하지만, 나와 무관한 운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나의 인생 역시 그 운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내 삶에 있어 운을 생각해보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내 부모님은 두 분 다 젊을 적부터 서울에 올라와 고된 노동을 하며 돈을 버셨다. 그러한 노고 덕분에 나는 내일 밥을 먹을 수 있을지, 추운 겨울을 어떻게 견딜지, 이런 생존에 대한 고민은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풍족하게 살아본 적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근본적인 생존의 문제를 일상적으로 절박하게 느끼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그것은 나의 능력이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좋은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난 제 운이 좋아서일 뿐이다.
그러나 이 사회 어딘가에선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내일 밥을 먹을 수 있을지, 차디찬 한파를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이런 생존의 문제가 그들에겐 일상이다. 매일 그러한 문제를 근근이 해결하는 것이 그들의 삶이다. 같은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임에도 운은 이렇게 삶의 모습을 현저하게 바꿔놓는다.
난 사람의 존엄성을 믿는다. 누구든 따뜻한 밥을 먹고, 따뜻한 방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존엄성은 제대로 지켜질 수 있다. 운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모두가 능히 행복을 추구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은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그러한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항상 소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늘 나눔을 생각하고, 늘 함께 돕고, 견디는 삶을 희망한다.
새어 들어오는 차디찬 겨울날의 한파는 두꺼운 옷마저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한파 속에서도 마음만큼은 따뜻할 수 있길 바란다. 누구든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제 작은 행운이 다른 이의 의도치 않은 불행을 위해 쓰이길 바란다. 제 작은 마음이 힘든 겨울을 보내는 누군가에게 전해지길 바란다.
빨간 냄비를 보며, 그 마음을 다시금 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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