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음악

나를 돌아보게 해

김그린. 2018. 9. 9. 02:15


90년대 한국 음악. 최근 많이 회자되던, 그 당시 대중음악에서 약간만 시각을 돌려보면, 대중의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소중한 음반들을 만날 수 있다. H2O의 ‘오늘 나는’ 은 그 음반들 중 단연 최고라 꼽을 수 있다.


80년대 헤비메탈과 90년대 인디음악의 가교 역할을 한 음반이자, 한국 락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음반이다. 이 음반이 보여준 곡 구성, 연주 방식, 세련된 가사는 분명히 90년대, 더 나아가 21세기 한국 락에서 우리가 자주 마주치던 모습이며, 설령 직접적으로 이 음반이 예상치 못한 불운으로 모두의 관심 뒷켠으로 사라지며 잊혀졌을지라도, 여러 인디밴드와 가요에 상당한 기여가 되었으리라,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방향성의 시발점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음반을 처음 켰을 때 만나게 되는 ‘오늘 나는’ 의 질주하는 리듬기타 리프는 밴드가 이 음반은 그 전의 한국 락과 확연히 다른 음반일 것임을 선언하는 듯하다. 당시 한국 락씬은 - 더 나아가 대중음악(여기서는 대중음악이란 단어를 팝에 국한하여 상용하였다) 시장에서는 -   강렬한 솔로 연주 중심의 기타 연주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음악계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듯한, 밴드의 자신감이 묻어나는 기타 리프다.


이 자신만만한 H2O의 리듬기타는 그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한국 락 밴드들의 기타 연주에 견주어봐도 손색이 없으며, 00년대 초반에 등장한 스트록스를 위시한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의 향기마저 느껴진다. 기존의 한국 락과 차별화된 연주 방식과 곡 구성 못지 않게 압권인 것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에서 찾아보기 힘든 세련된 가사다. 이 부분은 특히 ‘나를 돌아보게 해’ 에서 두드러진다.


“회색 해는 넘어가고 별과 달이 머리 위로 떠오르면 고개 들어 노래해야만이 느낄 수 있는 노래를 하지"


이 노래가 발매된 93년 당시 한국 음악계에서 이만큼 세련된 도회미를 담담하게 그려낸 가사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심지어 약 24년이 지난, 지금 2018년 대중음악이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세월에 바래지 않는 감성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음반이 어떠한 내적인 결함이 아닌, 보컬의 마약 범죄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한 채 대중의 무관심 속에서 묻혀버렸다는 사실이 참으로 슬프다.  비록 내 타임라인에 이런 음악 취향을 사랑할 만한 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한 사람의 음악 팬으로서 ‘오늘 나는’ 이라는 음반이 한국 대중음악의 으슥한 곳 어딘가에서 그 빛을 잃지 않고 아직 많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글을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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